[칼럼] 파리의 소 ‘꼬리’와 서울의 ‘어린쥐’
파리의 소 ‘꼬리’와 서울의 ‘어린쥐’ 명순구 (고려대 법대 교수)
프랑스 유학시절에 들은 이야기이다. 프랑스에 온지 얼마 안 되는 한국 유학생이 소 꼬리곰탕을 끓여먹을 요량으로 정육점에 갔다. 그는 ‘꼬리’를 달라고 말하였다. 정육점 아저씨는 흠칫 놀라면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나서 “그것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정육점 앞을 지나다니면서 쇼 윈도에 늘 싱싱한 소 꼬리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아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학생은 정육점 아저씨가 인종차별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애써 억누르고 손가락으로 쇼 윈도의 소 꼬리를 가리키며 “여기 꼬리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정육점 아저씨의 대답, “아, 그것은 ‘심장’이 아니고 ‘꼬리’입니다!” 유학생은 ‘QUEUE’(꼬리)를 의도하고 말했으나 정육점 아저씨는 ‘COEUR’(심장)로 알아듣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프랑스어에는 어려운 발음들이 있다. ‘COEUR’의 ‘OEU’ 부분에 대한 발음(발음기호: œ)과 ‘QUEUE’의 ‘EUE’ 부분에 대한 발음(발음기호: ø)도 매우 어려운 발음에 속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막상 스스로 해보면 잘 안 된다. [œ]는 ‘왜’ 비슷하지만 ‘왜’가 아니고, [ø]는 ‘외’ 비슷하지만 ‘외’가 아니다. 어학의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두 발음을 자연스레 구별하여 구사할 수 있다면 원어민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면 새내기 한국 유학생에게 위 정육점 사건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외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한다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인가? 요즘 ‘오렌지 논쟁’이 예사롭지 않다. 영어의 ‘ORANGE’를 놓고 ‘오렌지’가 아니라 ‘오뤤지’라나 ‘어린쥐’라나... 발음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ORANGE’는 [ɔ:rindʒ]이지 ‘오렌지’도, ‘어린쥐’도, ‘오린지’도 아닐 것 같다. 한글 어학 전문가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오렌지’로 표기하기로 제안하였고, 그에 대하여 최소한 묵시적으로나마 국민적인 합의가 있어 오늘에까지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모 인사는 국립국어원의 외국어표기법의 수정·보완까지 들먹이고 있다. ‘ORANGE’ 발음을 잘 하는 것과 외국어표기법을 손보는 것은 별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또한, 학문적 월권의 우를 범한 것 같기도 하다. 전문가가 한 일을 비전문가가 전문적 식견 없이 비판하는 행위는 비학문적이기 때문이다. 파리의 정육점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모든 사정을 알고 나서 두 사람은 잔잔한 미소를 교환했다. 돈을 지불하고 정육점을 나서려는 순간에 프랑스 사람은, “당신은 어떻게 ‘QUEUE’를 ‘COEUR’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하였다. 유학생은, “나는 분명히 ‘꼬리’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둘은 친구가 되었고, 유학생은 소 꼬리를 아주 싸게 구입하든지 혹은 공짜로 먹었다고 한다. 외국어 발음을 반드시 원어민 수준으로 하여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사람은 발음이 조금 서툴러도 오히려 그것이 얘깃거리가 되어 뜻밖의 성과를 얻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외국어를 하는 목적은 다양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외국 친구는 한국 문학을 연구한다. 그는 한국 문학에 대하여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분야에 있어서 나 같은 사람과 상대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의 한국어 발음은 나보다 못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국 문학의 전문가라 하여 한국어 발음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의 한국어에서 중요한 것은 읽고 쓰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외국 친구와 우정이 깊어지고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열쇠는 외국인과 같은 수준의 발음과 매끄러운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포용하는 마음이 요체일 것이다.
[2008년 2월 5일]